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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졸업생에서 변호사로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서 노판석(76년 작고)씨와 이순례(98년 작고)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은 고향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한 뒤 63년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지만 한달 반 만에 그만 두고 울산에서 잠시 막노동도 했다. 고향에 돌아와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에 들어간 노 전 대통령은 1968년부터 71년까지 강원도의 전방사단에서 소총수로 복무했다. 제대 후 다시 고시공부를 하던 노 전 대통령은 같은 마을에 살던 권양숙 여사와 결혼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 전 대통령은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 만에 그만두고 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조세소송을 많이 맡았던 노 전 대통령은 높은 승소율로 지역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1981년 시국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는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사건 변론이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잠시 누렸던 변호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뒤로한 그의 선택은 이후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권 변호사에서 청문회 스타로

당시 운동권 학생 및 재야인사와 교류를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노동법률 상담소 등을 차리는 등 재야운동에 나섰고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는 대우조선 이석규씨 사망사건 개입으로 구속됐다가 21일 만에 풀려나는 등 '거리의 변호사'가 됐다. 당시 쟁의현장에서 그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열정적인 연설을 해 강한 인상을 남겼고, 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공천 제의를 받아 13대 총선 때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해 말 5공 청문회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을 논리 정연하게 추궁해 '청문회 스타'가 됐다. 텔레비전이 만든 사실상의 첫 스타 정치인이었고, 무명의 초선 의원 '노무현'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게 됐다.

시련과 좌절, 그리고 대통령 당선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90년 1월 민자당을 만든 3당 합당 때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손을 뿌리침으로써 지역주의와의 싸움이라는 힘겨운 정치 행로에 접어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고하며 "잘못된 정치풍토에 타협하지 않은 것이 내 큰 자부심"이라고 했다. 92년 14대 총선 때 야당인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부산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95년 부산시장 선거 때도 또 낙선했다. '청문회 스타'가 넘기에도 지역주의 벽은 너무 높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95년 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도 노 전 대통령은 "보스중심 줄서기의 답습"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97년 대선 직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진영에 합류해 그의 당선을 도왔다.

노 전 대통령은 98년 서울 종로 재·보궐 선거로 다시 국회의원이 됐지만 2000년 16대 총선 때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지역주의 벽에 도전했다. 결과는 또 한번의 패배였다. 노 전 대통령은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의 '무모한 도전'에 감동한 지지자들이 '노사모'를 만들었다. 그는 낙선했지만 강고한 지지층을 얻었고, '노사모'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나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승리라는 '노풍'을 일으켰다. 이후 지지율이 급락하자 여당 내부에서 후보 교체론이 불거지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 대선 직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제16대 대통령에 극적으로 당선됐다.

"원칙과 소신" "독선과 아집"

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지역과 계층간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면서도,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풍토는 청산돼야 한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5년간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강도 높은 변화를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그 변화를 주도하며, 논란의 한복판에 서곤 했다.

국내 정치를 뒤흔들었던 대북송금 특검, 대통령 탄핵과 역풍,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모두 노 전 대통령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대북송금 특검 수사는 집권당 전통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쓴 결정이었고,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에 '차떼기당'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노 전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노 전 대통령은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의 수뢰사건이 터지자 '재신임'이라는 승부수를 걸었다. 2004년 말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법, 신문법 등 쟁점입법을 추진했고, 정치권과 사회는 이 문제를 두고 5년 내내 대립과 반목을 거듭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권력 문화를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대 정권에서 여당은 청와대의 부속기관쯤으로 인식돼 왔지만 노 전 대통령은 여당에 자율권을 부여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여겨졌던 사정(司正) 기관에 대한 장악력도 포기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무질서와 권위 붕괴라며 못마땅해하는 반응도 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다"는 등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등으로 탄핵 위기에 몰렸다. 탄핵안 가결에 망설였던 국회는 노 전 대통령이 형 건평씨에게 돈을 준 혐의로 수사를 받던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공개 언급해 자살로 이어지자, 2004년 3월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국회의 탄핵은 거센 역풍을 낳았고, 그 결과는 여당의 총선 압승으로 나타났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진실의 문' 앞에서 서성이다 극단적 선택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본인 뜻대로 고향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봉하마을로 돌아가면서 지지자들에게 "노무현이란 정치인도 알고 보면 괜찮은 종자다. 종자 씨 말리지 말고 앞으로 사랑해달라"고 했다.

봉하마을에서의 생활은 평온하게 시작됐다. 그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넘쳐났고, 노 전 대통령의 바람대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봉하마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지난 4월에는 전직 대통령으론 세 번째로 검찰청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도덕성을 강조하며 기존 정치권과 차별화를 시도했던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도덕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진실의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23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했다.












2009/05/23 22:25 2009/05/23 22:25